『영화』 1993.01.01.(146호)베스트

특집I. '92 한국영화

영화평론가 12인 선정

1992년
한국영화 베스트5

일관된 영화적 흔적도 없어

정성일
영화평론가

『김의 전쟁』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
『장군의 아들3』
『하얀 전쟁』

1992년은 정치적 소란스러움에 비하면 영화는 마치 우리 사회와 아무 관계가 없다는 듯이 스쳐 지나갔다. 그건 우리영화가 현실로부터 얼마나 멀리 있는가를 보여주는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될 것이다. 우리에게서 영화는 사회의 거울인가, 촛불인가 라는 논쟁은 마치 허풍선과 팝콘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일정부분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92년 가장 흥행에 성공한『결혼이야기』를 돌아보자. 이 재치 있고 게다가 만만치 않은 유머까지 지닌 영화를 상투적인 상업영화의 틀이라는 이유로 비판한다는 것은 관객과 제작자 그 누구에게도 유익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감독의 경우는 다르다. 그는 이 한 작품으로 은퇴할 것이 아니며 오히려 지금부터 시작이다. 그에게 필요한 일은 과장된(오히려 재롱을 보는 듯한 건방진 태도로) 칭찬이 아니라 엄격한 비판이다. 만일 그런 일을 방조한다면 우리는 뒤이어『미스터 맘마』와 같은 삼류영화까지도 꾹 참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참을 수 있지만 그렇게 가까스로 찾아놓은 관객까지 다시 한국영화에서 내쫓는 일은 누구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여기 올라온 다섯편의 영화가 만족스러운 것은 결코 아니다. 심지어 이 영화들은 걸작이라고 부르기에는 치명적인 결함은 지니고 있으며 더 나아가 이미 예고되었던 92년 한국을 어떻게 사고하는가에 관한 그 어떤 일관된 영화적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일정한 시간이 흐른 후에 후세의 사가들은 도대체 92년의 한국영화를 무엇이라고 부를 것인가에 관해서 잠시라도 생각해 본 것일까?

여전히 비디오판권을 넘기기에 급급한 영화들이 넘쳐흐르고 혹시나 이 나라 영화산업이 소프트포르노가 아닐까 하는 염려스러운 영화들이 365일을 메우고 있다. 이미 직배영화는 산업시스템으로서의 한국영화 내부에 깊숙히 자리잡은 지 오래이며(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이제 관객들은 죄의식 없이 직배영화를 본다) 엄숙한 비판자들은 사대주의자이거나 패배주의자들로 몰린다.

그러나 근심은 그것만이 아니다. 93년은 아마도 일본영화 수입에 관한 치열한 공방전이 뒤따를 것으로 보인다. 매국노들은 근엄한 표정으로 온갖 괴변을 늘어놓으며 앞장 설 것이고, 장사꾼들은 갑자기 문화론자로 둔갑할 것이다.

그러나, 정말 두눈 크게 뜨고 보자. 그렇게 앞장서는 자들은 허풍장이들이며 정말 위험한 것은 갑자기 침묵하는 자, 침묵을 부추기는 자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내년 베스트 5에 한일 합작이 포함되어 있지 않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