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 1997.01.에디토리얼|엔드크레딧

영화의 두번째
세기의 두번째 일년
새로운 시작

1997년 1월의 키노는 독자 여러분에게 보내는 새해인사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상투적인 인사가 아니라 여러분과 함께 바로 여기 영화 속으로 들어오는 동지애의 권유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키노를 읽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키노를 통해 여러분이 영화 속으로 들어와 영화의 영토 위를 함께 비상하기 위해 감싸 안으려고 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키노라는 개념을 통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새해의 목표입니다.

키노의 해피 뉴 이어 인사는 두번째 새로운 출발입니다. 우리는 이미 일년 전 여러분에게 다가올 영화, 축복받은 영화, 창조하는 영화를 지키겠노라고 약속하겠습니다. 그리고 스탠리 큐브릭과 잉그마르 베르히만에 관한 특집(키노 10호와 20호), 깐느에 맞선 우리의 선택과 영화광들의 영화(들), 이미지의 수사학, 백편의 비디오 백일야화와 저패니메이션을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독자 여러분께서 우리가 열거한 것들을 지난 앙케이트 엽서의 '가장 주목했던 기사 하나'에 열두권의 키노를 뒤져 선정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물론 이것이 충분치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자, 이제 중요한 것은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선 이번 키노를 보시면서 가장 놀라운 것 중의 하나는 이번 호는 마치 '다른' 키노처럼 보인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번에 한해서 원칙을 버리고 마치 잼 세션처럼, 또는 실험영화를 만드는 기분으로, 다르게 만들기로 편집회의에서 결정하였습니다. 이것은 키노(들)가 서로 다른 시선으로 읽어내는 영화의 지형도입니다. 우리는 영화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이 서로 얽혀든 의미를 갖고 있으며, 이 속에서 만들어지는 영화에 이미 이 모든 것이 그 자체로 육화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더 나아가 영화와 영화를 만들어내는 땅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으며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를 포개고 감싸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좌표를 이동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치게 순응주의적이며,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는 패배의 표시라면?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의 선택, 날아오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좌표 위로 비상하여 그것을 위로부터 내려다보고 부분으로부터 전체를 상상하는 대신 전체로부터 부분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이번 우리의 '반성과 전망'(이것이 이번 키노의 두 가지 개념입니다)은 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우리가 비상하여 상투적인 상대주의와 텍스트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실재성의 바탕 위에 그 영화가 만들어지는 영토를 보려는 것입니다.

종종 영화는 예술의 이름을 빌려 마치 그 모든 포착을 벗어나는 그 어떤 초월적인 대상인 것처럼 우리를 위협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사실 바로 그러한 노력이야말로 속임수이며, 우리가 만들어내는 영화가 우리를 넘어선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 사실을 인정한다면 영화는 여기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어디선가 만들어져서 우리에게 주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러하다면 영화는 이미 영화가 아니라 영화에 관한 일종의 이데아, 상상 속의 대상, 그 누구도 공유할 수 없는 각자의 순수한 환상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영화가 영화이기 위해서는 거꾸로 우리 속으로 들어오고 그래서 우리 곁에 기대어 서거나 이미 우리의 안으로 들어와 있을 때 영화라는 '비어 있는' 말을 실체로서 '채우는' 것입니다. 오히려 영화의 진짜 문제는 그것이 지나칠 정도로 실재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화로부터의 이해관계에 얽히지 않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그러기 위해서, 그 어떤 이해관계로부터 벗어나서, 그러나 그것을 잊는 것이 아니라 보기 위해서 날아 보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반의 날개입니다. 나머지 절반은 바로 당신의 의지입니다. 그래서 함께 날아오를 때 우리는비로소 올바른 원근법으로 지도를 그려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 이제 우리는 함께 하늘을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깥에서 안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관찰하고 방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부를 비행하며 내려다 보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안에 있으면서 바깥에 있을 수 있는 것이며, 바깥이면서 이미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루의 실천방법입니다. 우리는 여기 여러분과 바로 지금 날기를 바랍니다. 추락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요. 우리는 날아오르고, 그리고 함께 착륙할 것입니다.


「핑크 깃발」와이어

펑크 밴드 와이어는 감동을 주는 것이 일순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단순명쾌한 그들의 데뷰작은 단숨에 결론에 이른다. 그래서 심지어 단 하나의 코드로 구성된 28초짜리 싱글마저 승부한다. 그 감동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우리는 그것이 자기의 깃발을 울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의 신념을 가지고 세상에 선언하는 것이다. 이기고 지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건 정말이다.


「미래의 비전(들); 영화의 새로운 테크놀로지들」필립 헤이워드와 타나 월렌(편)

뤼미에르 이래 언제나 그러한 것처럼 영화에서 새로운 비전은 테크놀로지가 미학을 앞질러 온다. 그래서 미학은 과학과 맞서 싸워야만 한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미학은 서둘러 뒤쫓고 있지만 항상 잘못 길을 든 것 같다. 문제는 테크놀로지가 미학마저 흡수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둘은 서로 '다른' 하나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비전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 미학의 전략이 필요한 시간이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홍상수 감독

이미 보신 60편의 우리영화와 450편의 외국영화 중에서 96년 키노 독자 여러분이 뽑으신 베스트 영화는 홍상수 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과 아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입니다. 이 두편의 영화에서 여러분들이 보는 가장 큰 지혜는 무엇이었습니까? 이들 감독은 우리의 시대에 대해서 어떤 진실을 이야기했습니까? 그리하여 여러분들이 동의한다(!)고 기꺼이 대답한 이 영화들은 무엇으로 감동시켰습니까? 바로 이 세 가지 질문, 지혜와 진실 그리고 정서에 관한 이음새를 만들어내는 그 영화에 대한 우리의 해명은 계속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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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도 그랬지만 이맘 때면 나는 올해의 영화를 뽑는다. 우선 최고는 마티유 카소비츠의 <증오>이다. 지난 몇년간 이만큼 힘이 넘쳐나는 영화를 본 적이 없다. 앙겔로풀로스의 <율리시즈의 시선>은 한없이 사유하게 만든다. 나는 이 감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것은 정말로 90년대의 걸작이다. 뒤늦게 본 사티아지트 레이는 요즘 나의 가장 큰 관심이다. 그는 틀림없이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적' 스승이다. 미루고 미루던 루이스 부뉴엘의 <안달루시아의 개>를 비로소(!) 보았다. 올해 본 가장 우스운 영화였다. 너무 웃었다! 정말 대단하다. 내년에는 망설이던 라이프니츠를 읽어볼 생각이다. 자꾸만 그의 사유의 편린들에 이끌린다. 나는 근대철학이 막 시작되던 시기의 철학에 가장 이끌린다. 아직은 모더니티의 시대에 머물고 있나보다. 다들 포스트모던의 피안으로 떠난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