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 2002.03.베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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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화 의

순 서 를  매 기 는

유 머 의   방 식


정성일 ( 영화평론가 · 본지 편집위원 )

2001년 외국영화의 개인적 베스트 10

나는 2002년을 다소 늦게 시작했다. 지난해에 이어서 1월에도 임권택 감독의 영화 현장에 있었으며(드디어 촬영이 끝났다. 이제 편집이 남아 있다), 이미 지난해에 영화제에서 소개된 김기덕 감독의 <나쁜 남자>의 논쟁에 (절반은 기꺼이) 끼여들어서 그에 관한 글을 쓰고 아주 긴 인터뷰를 하였다(「씨네 21」제 339호에 실린 내용은 전체 내용 중 3분의 1이다), 1월에 개봉한 영화는 대부분 보지 못했으며, 또는 보아야 할 필요도 별로 느끼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사실「키노」를 뒤늦게 읽었다(그런데 배달도 늦게 왔다). 아마도 이 글이 좀 늦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나는 2월에야「키노」1월호를 읽게 되었는데, 거기에 연말 결산 열 편의 영화가 실려 있었다. 연말 결산 영화를 (자기가 좋은 순서대로) 뽑는 일은 유머이기 때문에, 그것을 정색을 하고 비판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걸 우두커니 읽다가 거의 대부분 동의하기 힘들어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하지만 이 글이 오해를 불러일으키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이 글도 어느 정도는 유머에 기대서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나는 한국영화에 대해서는 열 편을 뽑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유는「키노」2002년 1월호 56쪽에서 정재은 감독이 내 글을 읽은 다음 "흥분한 나머지 약 20페이지에 달하는 글을 미친 듯이 썼다"는 대목을 읽고 마음이 많이 아팠기 때문이다. 사실 영화에 관한 평이란 감독 자신에게는 일종의 분할할 수 없는 잔여자(indivisible reminder)처럼 계속 귀환하는 반성적 경정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에 관한 글에서 칭찬을 원하는 것은 증후의 속임수에 넘어가는 것이다. 영화에 관한 글이란 이미 제도적 구조에로 편입하려는 영화를 원래의 불확실한 위치에로 되돌리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명한 말. Che Vuoi? 당신이 내게 그것을 말하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당신은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가, 또는 무엇을 목표로 하는가? 영화에 관한 글이란 정확하게 그 장소에 자기의 고정점을 정하는 것이다. 나는 <고양이를 부탁해>에 대한 내 생각을 철회할 생각이 없으며, 그렇기 떄문에 이 영화를 작년 한국영화 중에서 두 번째 순위에 올려놓은「키노」편집부의 기준에도 동의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한편의 영화에 대해서 두 번씩 반대 의사를 표명할 생각은 없어졌다. 그건 아무래도 좋다. 한국영화에 관한 순위의 결정은 전적으로 미적인 취향의 태도가 아니라 여기에는 좀 복잡한 정책적(정치적이 아니다!) 계산도 있기 때문에, 그것은 내가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외국영화 열 편은 우리가 같은 영화관에서 같은 영화를 본다고 해서 꼭 같은 감흥을 느끼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게임의 규칙은 우선 동일한 조건을 전제하는 것이다. 나도 영화제에서 보거나, 아니면 개봉하지 않은 영화는 모두 제외시켰다(따라서 알렝 레네의 <스모킹, 노스모킹>과 마노엘 데 올리베이라의 <프란체스카>가 모두 빠져야 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고 만들어진 지 10년이 넘는 영화도 제외시켰다(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성냥공장소녀>를 빼야 한다! 이건 참 가슴 아픈 일이다). 다만 지난해 11월 30일까지 개봉한 영화를 그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하지만 할 수 없다. 규칙은 규칙이다!

지난해에 내가 본 영화 중에 첫 번째 자리는 데이빗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이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영화가 순위에 아예 모습을 보이지 않느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의도가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스트레이트 스토리>도 좋다. 하지만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위대한 영화의 발명이다. 이 영화는 우리가 당대에 살아 생전에 알랜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을 목격하는 것과 같은 체험이다. 교과서에 실려서 거의 모든 영화들이 그 영화의 영향권 아래 놓여진 다음에 비로소 그 원본을 대하는 존경심에서가 아니라, 정말 함께 살아가면서 동시대성을 안고 이 놀라운 영화적 기억의 현재와 마주하는 것이다. 데이빗 린치는 우리에게 이제까지 영화적 잉여라고 생각되어 온 것을 끌어들여 그 안에서 숨바꼭질을 벌인다. 그가 뫼비우스의 띠를 주인-서사로 하여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 놀라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서사 안에서 끝까지 양자택일을 미루는(누가 꿈이고, 누가 사실인가/ 베티와 리타가 어느 순간에 역할을 다시 바꾸는가? 할리우드 50년대 코미디와 40년대 필름 느와르 사이에서 만들어진 근본적인 무력함이 만드는 역설은 어느 방향에서 배달되는가?) 그 지연-차이의 미루어진 대답의 반복이 우리를 두려움에 질리게 만든다. 이 영화를 감각에 의지해서 직관적으로 보아야 한다고 누군가 썼다(그런데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지? 정말 영화를 그렇게 보는 것이 가능할까?). 데이빗 린치는 그런 영화를 발명한 것이 아니다(또는 그렇게 무책임하게 쓰면 정말 안 된다). 여기에는 동일성의 거래를 중단시키기 위한 관찰의 상실이 있다. 수수께끼는 풀면 재미없어진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풀 수 없는 수수께끼를 만드는 것이다. 수수께끼의 서사는 성립되는데, 거기에 대답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건 서사를 욕망하는 자리의 (비어 있는) 타자의 (채워진) 타자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그 술래를 알 수 없는 전이의 질서에서 나오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이 영화에서 가장 놀라운 장면은 패스트푸드점에서의 진술을 반복하는 대목이다).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는 자리에서 벌어진 무능력한 관찰은 데이빗 린치가 히치콕의 얼굴을 반대의 자리에서 생각해보는 것이다. 중간에서 자리를 바꾸는 것,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이 영화가 동시에 히치콕의 <사이코>에 대한 (매우 은밀한) 오마주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가지 더 이상한 점,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서사의 관점에서만 생각해보면 후 샤오시엔의 <밀레니엄 맘보>와 이상할 만큼 같은 과정을 따라가고 있다. 이 점은 나중에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두 번째 영화는 난니 모레띠의 <나의 즐거운 일기>이다. 그러나 사실 맨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의 감흥은 많이 사라져버렸다. 그건 <아들의 방> 때문이다. 혹시 내가 오해한 까닭에 이 영화를 감싸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버리지 못하는 것은 두 번째 에피소드 때문이다. 여기에는 기이한 방식으로 로셀리니의 <이탈리아 여행>과 안토니오니의 <정사>, 그리고 파졸리니의 <돼지우리>를 끌어오리는 난니 모레띠의 유머가 있다. 그런데 세 번째 에피소드는 아직도 그가 정말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세 번째 영화는 스티븐 소더버그의 <트래픽>이다. 이 영화를 보자마자 나는 이건 정말 굉장하다(!)라고 중얼거렸다. 로버트 알트만의 만화경과도 같은 비전을 갖고 장르 안에 들어가서, 키에슬로프스키를 연상케 하는 그 운명의 인과율을 적용시켜가면서, 이 모든 것을 니콜라스 레이적인 하드 보일드의 느와르로 멜랑콜리하게 엮어낸다. 소더버그는 정말 신기한 방법으로 (고다르가 그토록 부러워했던) 미국 영화의 좋은 전통으로 돌아왔다.

네 번쨰 영화는 서극의 <순류역류>이다. 먼저 고백하자면 나는 이 영화를 볼 기회를 몇 번이고 놓쳤다. 심지어 베니스영화에서 이 영화를 눈 앞에 두고 그냥 다른 영화를 보러 들어갔다. 왜냐하면 서극은 이제 끝장(!)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씨네 21」의 허문영 편집장이 이 영화를 느닷없이 추천하였다(그는 매우 열정적인 시네필이다. 아직도 새로운 영화를 '발견'하는 꿈을 꿀 줄 아는 사람이다. 이만큼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은「키노」의 이연호 편집장이다. 결국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은 '발견'에서 시작한다). 그날 돌아오는 길에 집 앞에서 아무도 빌린 적이 없는 이 영화의 비디오를 들고 와서 보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이 앉아서 두 번을 보았다. 이건 걸작이다. 감히 이 놀랄만한 리믹스는 (화어권 영화들 속에서 지난해) 후 샤오시엔의 <밀레니엄 맘보>에 겨눌 만한 영화이다. 쉽게 말하면 <메이드 인 홍콩>의 공간에서 <매트릭스>를 뛰어넘어 가면서 <와호장룡>을 하이퍼 리얼리티 버전으로 창조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나는 그 해 <매트릭스>를 '키노 10 베스트영화(들)'에 포함시키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한다(그건 마치 <블레이드 러너>를 그 해 순위에서 빼놓은 다음 내내 통탄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서극은 그의 주력부대를 이끌고 홍콩의 뒷골목 아파트의 미로 안으로 들어가 리얼리즘의 공간에서 장르의 판타지를 무한정 지속시킨다. 여기에는 순수한 액션의 물리적 지속이 가져온 한계를 기어이 돌파하는 아방가르드의 정신이 있다. 무려 한 시퀀스가 28분 40초에 이른다! 나는 쇼트를 지속시키는 것보다, 시퀀스를 지속시키는 것이 훨씬 힘들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수많은 쇼트로 나누지만, 결국에는 열 개 미만의 시퀀스로 이루어진 오즈와 브레송의 영화들. 또는 일단 한번 자기의 연출을 펼치는 순간 무한정 계속될 것 같은 시퀀스를 담아내는 장 르노와르와 존 포드의 영화들. 결국 영화는 이렇게 무모하고 오만방자한 액션의 실험을 통해서만 발전한다.

다섯 번째 영화는 이마무라 쇼헤이의 <간장선생>이다. 태평양전쟁과 히로시마 원폭투하에 대한 이마무라의 반격은 순진한 섹스와 황당무계한 유머, 지칠 줄 모르는 욕망과 맹목적인 히포크라테스의 신념을 육신 속에서 껴안는 것이다. 이 영화는 생명력으로 무한정 넘쳐난다. 그는 역사 안에 들어와서 이성의 패배를 떠안으면서도 그 안에서 삶의 긍정을 바라본다. 온통 죄의식과 패배감, 그리고 의심과 분열에 가득 찬 오시마 나기사의 <고핫토>와 정반대의 자리에서 이마무라는 우리에게 힘을 내라고 응원한다. 너의 욕망을 포기하지 마라!

여섯 번째 영화. 누구라도 진심으로 영화를 만들면 한 편의 걸작을 만들 수 있음을 보여주는 빌 콘든의 <갓 앤 몬스터>를 놓친다면 최소한 당신은 컬트영화 팬으로서는 자격상실이다. <프랑켄슈타인>으로 잘 알려진 제임스 웨일의 자서전을 만든 이 영화는(그런데 존경이 지나쳐서 사실과 꾸며낸 이야기가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할리우드의 마이너한 연대기이며, 동시에 캠프영화이며, 무엇보다도 프랑켄슈타인의 기괴한 계보학이다. 고상함에 대한 경멸과 증오, 소수의 침묵의 맹세, 살아 있는 시체에 관한 최초의 네크로필리아적 전통의 탄생. 여기에는 영화의 더렵혀진 역사에 관한 소박한 레퀴엠이 있다.

일곱 번째 영화는 제임스 그레이의 <더 야드>이다. 묻고 물어 찾아서 처음 가본 텅 빈 영화관에서 세 명과 함께 본 이 영화는 올해의 '저주받은 걸작'이다(지나치게 '축복 받은 영화'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메멘토>이다). 다시 아버지의 강박관념의 세계로 돌아온 제임스 그레이는 마틴 스콜세지와 마이클 치미노의 사이 그 어딘가에 있다. 음울하고, 종종 길을 잃기도 하면서도 때로 사색하는 듯한 일순간의 짧은 쇼트들은 그가 자신의 세대에서 보여주는 다할나위 없는 신중함이다. 이 영화와 함께 토드 솔론즈의 <스토리텔링>은 지난해 만난 포스트 매너리즘의 걸작이다.

여덟 번째 영화는 오시이 마모루의 <아바론>이다. 이 영화를 처음 본 것은 조악한 비디오 화질의 첫 몇 장면이엇다. 그 순간 나는 이 영화를 이렇게 보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억지로 보고 싶은 참을 수 없는 소망을 단호히 끊고 영화관에서 볼 날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본 순간 내가 완전히 오해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영화는 그 앞부분의 신기한 장면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의 오시이의 메시지 때문에 만든 것이었다. 이건 우리들의 아이들을 위해서 만든 오시이의 간절한 소망이다. 게임에 미치고, 인터넷에 중독되고, 그래서 작은 방 구석에 처박혀 점점 더 폐쇄적인 오타쿠가 되어 가는 아이들에게 제발 거리로 나와서 함께 만나자고 오시이는 진심으로 부탁한다. 나는 이런 마음을 만날 때마다 요즘 자꾸만 눈물이 난다. 물론 오시이는 이 마지막 장면이 없다면 더 멋있어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공각기동대>를 만든 사람이다. 더 멋있어 보이는 것만으로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아홉 번째 영화는 유키사다 이사오의 <고>이다. 어쩌면 설마(!)라는 표정을 지을지도 모른다. 나는 안다. 그러나 이건 내 개인적인 10 베스트 목록이다. 이 점을 기억해주시기 바란다. 이 영화에서 시종일관 넘쳐나는 순정의 감격과 감상주의의 눈물, 게다가 10대 소녀 '망가'에서 빌려온 것이 너무나도 자명한 상황, 이미 예정된 해피엔딩에 이르기까지 한 치도 도망치지 않고 빠져드는 꼼짝없는 주인공 연인들은 웃음을 참지 못하게 만든다. 일본의 '조센징'을 다루는 문제의식도 심각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는 내내 감정을 솔직하게 만들어서 보는 사람이 십대시절로 돌아가 이상하리만큼 가슴 설레게 되고야 만다. 이것이야말로 우라야마의 <큐포라가 있는 거리>, 아즈마 요이치의 <사도; 삼루수 소년>, 오바야시의 <전학생>, 쇼마이 신지의 <태풍클럽>, 기타노 다케시의 <키즈 리턴>으로 이어지는 일본 십대영화의 (하스미 시게히코의 표현을 빌리면) '과격한 감정교육의 이해 받기 곤란해서 이해할 수밖에 없는 실천적 전통'이다. 그리고 고백하건데(「키노」의 소개에 따르면) 영화감독 박찬욱, 김지운, 오승욱 씨가 일본 B급영화의 열렬한 지지자들이라면, 나는 일본 십대영화의 사무치는 팬클럽이다. (참고삼아 내 생각으로) 십대영화의 괴작(怪作)인 <오호! 꽃의 응원단>은 스즈키세이준의 <살인의 낙인>쯤은 '쪼인트 까고', 황당무계한 상상력의 <가키제국>은 <겐카 엘레지> 정도는 '사정없이' 뺨 때린다.

마지막 열 번째 영화는 로우 예의 <수쥬>이다. 상해에 관한 멜로 드라마를 이야기하는 척 하면서 히치콕의 <현기증>을 끌어들여 왕가위표 핸드 헨드 카메라와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만들어낸 이 일인칭 괴담은 새로운 중국영화의 '발견'이다. 이 영화가 정말 우리들에게 새롭게 여겨지는 것은 그 화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로우 예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지리의 기술방식에 있다. 그는 풍경의 고정관념 속에 개입해서 그 안에 기억과 장르를 기입한다. 가장 새로운 이름, 지아 장커가 시간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로우 예는 공간 속으로 잠겨든다. 그것은 같은 미로이다. 언젠가 그 둘은 만날 것이다. 후 샤오시엔의 <희몽인생>과 첸 카이거의 <패왕별희>가 1991년 스쳐 지나간 것처럼, 또는 왕가위의 <중경삼림>과 차이 밍량의 <애정만세>가 1994년 그렇게 했던 것처럼, 그들도 그러할 것이다. 그것이 중국인들이 고민하는 방식이다.

심심풀이 첨언(그러니 정색하고 읽지 말 것). 내가 들어본 몇 장 안 되는 음반들 중에서 지난해 가장 감동적인 '팝 앨범'은 밥 딜런의『사랑과 도둑질』이다. 가장 새로운 데뷔는 스트록스의『이게 그거야?』이며, 가장 귀에 착착 감기는 애청반은 마누 차오의『다음 역; 희망』이다.